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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의 풀잎이 서류가 되는 순간, 제도의 눈으로 본 자연

자연의 행정화: 생태계가 서류로 변환되는 과정

한 장의 A4 용지 위에 그려진 지도는 수천 년간 흘러온 강줄기를 직선으로 단순화한다. 복잡한 생태계의 미묘한 균형은 토지이용계획도의 색깔별 구역으로 축약되고, 계절마다 달라지는 습지의 모습은 고정된 경계선 안에 갇힌다. 이것이 바로 현대 행정체계가 자연을 인식하고 관리하는 방식이다.

제도의 눈으로 본 자연은 측정 가능하고 분류 가능한 객체가 된다. 생물다양성은 종의 개체수로, 산림은 목재 공급량으로, 하천은 수자원 확보량으로 환산된다. 이러한 변환 과정에서 자연의 본래 속성은 행정적 편의에 맞춰 재구성되며, 복잡한 생태적 관계는 단순한 수치와 도표로 대체된다.

행정 언어로 번역되는 생태계

자연환경보전법에 따르면 생태계는 ‘생태자연도’라는 형태로 문서화된다. 1등급부터 3등급까지의 구분체계는 생태적 가치를 행정적 판단 기준으로 변환시키는 대표적 사례다. 이 과정에서 서식지의 미세한 환경 변화나 종간 상호작용의 복잡성은 등급이라는 단순한 범주로 압축된다.

환경영향평가서는 이러한 번역 과정을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개발사업 지역의 생태계는 ‘현황조사’, ‘영향예측’, ‘저감방안’이라는 표준화된 서술 구조에 따라 기술된다. 실제 생태계에서 일어나는 예측 불가능한 변화들은 정량적 모델링과 시나리오 분석이라는 틀 안에서 관리 가능한 정보로 가공된다.

공간의 추상화와 경계의 고정

GIS(지리정보시스템) 기술의 발달은 자연공간의 행정화를 가속화했다. 위성영상과 수치지도를 통해 수집된 공간정보는 레이어별로 분류되고 데이터베이스화된다. 토지피복도, 식생분포도, 서식지도면 등으로 세분화된 자연은 컴퓨터 화면 속 픽셀의 집합체가 된다.

이러한 디지털 변환 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경계의 명확화다. 실제 생태계에서는 삼림과 초지, 육상과 수생 환경 사이의 전이구역이 존재하지만, 행정지도에서는 선명한 경계선으로 구분된다. 국토교통부의 토지이용현황도에서 산림지역과 농업지역을 구분하는 경계선은 실제 현장의 점진적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낸다.

시간의 정지와 동태성의 소거

행정문서 속 자연은 시간이 멈춘 정적인 상태로 기록된다. 환경부의 전국자연환경조사는 5년 주기로 실시되지만, 그 사이 일어나는 생태계의 변화는 포착되지 않는다. 조사 시점의 스냅샷만이 공식적인 현황으로 인정받으며, 계절적 변화나 연차별 변동은 행정적 판단에서 배제된다.

기후변화로 인한 생태계 이동이나 외래종 침입과 같은 동적 변화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현상들은 발생한 이후에야 새로운 조사를 통해 문서에 반영되며, 변화 과정 자체는 행정기록에서 누락된다. 결과적으로 제도적 자연인식은 항상 현실보다 한 걸음 늦은 정보에 기반하게 된다.

측정과 분류: 자연을 수치화하는 기술적 메커니즘

현대 행정체계에서 자연은 측정 가능한 지표들의 집합으로 재구성된다. 산소농도, pH 수치, 종다양성 지수, 바이오매스량 등 정량적 데이터가 생태계의 상태를 대변하는 공식 언어가 된다. 이러한 수치화 과정은 객관성과 비교가능성을 확보하지만, 동시에 측정되지 않는 생태적 속성들을 정책 결정에서 배제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생물다양성의 계량화 시스템

생물다양성협약에 따른 국가생물다양성 전략에서는 Shannon 다양성 지수, Simpson 지수 등 수학적 모델을 활용해 생태계의 다양성을 수치로 표현한다. 환경부의 ‘제4차 국가생물다양성전략’에 따르면, 2018년 기준 국내 기록종은 총 51,241종으로 집계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종 목록 중심의 접근법은 개체군 간 상호작용이나 생태적 기능의 다양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멸종위기종 지정 과정 역시 정량적 기준에 의존한다. 개체수 감소율, 서식지 면적, 개체군 크기 등의 수치가 보전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핵심 요소로 작용한다. 그러나 생태계 내에서의 기능적 역할이나 문화적 가치는 이러한 계량화 체계에서 부차적으로 취급된다.

환경질 평가의 표준화

대기환경기준, 수질환경기준 등 법정 기준치는 자연환경의 건강성을 판단하는 행정적 잣대 역할을 한다. 미세먼지 농도 35㎍/㎥, 생화학적 산소요구량 3mg/L 등 구체적 수치가 ‘좋음’과 ‘나쁨’을 구분하는 절대적 기준이 된다. 이러한 기준치 설정은 과학적 연구에 기반하지만, 지역별 생태적 특성이나 자연적 변동성은 고려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환경오염물질 배출량 산정에서도 유사한 표준화가 이뤄진다. 온실가스 배출량은 CO2 등량으로 환산되어 국가 간 비교가 가능한 형태로 가공된다. 2021년 국가 온실가스 배출량은 679.6백만톤 CO2eq로 집계되었지만, 이 수치 뒤에는 복잡한 산업구조와 에너지 시스템이 단순화되어 있다.

경제적 가치 환산의 확산

최근에는 생태계서비스의 경제적 가치를 화폐단위로 환산하는 시도가 확산되고 있다. 산림의 탄소흡수 기능, 습지의 수질정화 효과, 생물다양성의 유전자원 가치 등이 원화로 계산된다.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의 연구에 따르면 국내 산림의 연간 공익기능 가치는 259조원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적 환산은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는 생태적 가치를 화폐가치로 축소시킨다는 비판에 직면한다.

이처럼 자연의 수치화와 분류체계는 정책 결정의 객관성을 높이는 동시에, 약초 시장을 거닐다 만난 데이터의 그림자는 측정되지 않는 생태적 속성들이 제도적 관리의 틀 속에서 배제되며, 기술적 메커니즘이 자연 인식의 구조 자체를 재편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제도적 자연 인식의 한계와 대안적 접근

제도화된 자연 관리 방식은 근본적인 한계를 드러낸다. 생태계의 복잡성을 단순한 지표로 환원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정보가 손실되고, 지역 공동체의 전통적 지식은 배제된다. 이러한 접근법은 자연을 통제 가능한 객체로 인식하게 만들며, 인간과 자연의 상호작용을 일방적 관계로 왜곡시킨다.

행정 효율성을 추구하는 관료제적 사고는 생태계의 시간성을 무시한다. 수십 년에 걸친 산림 천이 과정을 연간 사업계획으로 관리하려 하고, 계절별 변화를 고정된 기준으로 평가한다. 결과적으로 자연의 고유한 리듬과 제도의 시간표 사이에 근본적 불일치가 발생한다.

정량화의 함정: 측정 불가능한 생태적 가치

생태계 서비스의 경제적 가치 평가는 대표적인 정량화 시도다. 습지의 정수 기능을 연간 몇 억 원으로 환산하고, 산림의 탄소 흡수량을 톤 단위로 계산한다. 이러한 수치화는 정책 결정에 유용한 근거를 제공하지만, 동시에 측정 불가능한 가치들을 배제시킨다.

생물 다양성의 내재적 가치나 지역 주민의 정서적 유대감은 숫자로 표현되기 어렵다. 새벽 안개 속에서 들려오는 새소리의 의미나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 숲 이야기의 가치는 어떤 평가 기준으로도 포착되지 않는다. 정량화 과정에서 이러한 질적 요소들이 체계적으로 누락되는 현상이 관찰된다.

지역 지식과 과학적 지식의 충돌

전문가의 과학적 분석과 지역 주민의 경험적 지식 사이에는 종종 갈등이 발생한다. 수십 년간 그 땅에서 살아온 농민이 관찰한 기후 변화 패턴과 기상청의 공식 데이터가 다를 수 있다. 어촌 주민이 체감하는 어족 자원의 변화와 수산 연구소의 자원량 평가가 상이한 결과를 보이기도 한다.

제도는 일반적으로 과학적 근거를 우선시하며 지역 지식을 비공식적인 것으로 취급한다. 하지만 최근 연구들은 전통적 생태 지식이 과학적 연구를 보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입증하고 있다. 두 지식 체계의 통합적 활용이 더욱 정확한 생태계 이해로 이어진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국립생태원의 생태협력 연구 프로그램은 지역 주민의 경험적 관찰 데이터를 과학적 모니터링 시스템에 결합해 생물 다양성 보전의 정밀도를 높이고 있다. 이는 전통적 지식의 가치를 과학적 방식으로 검증하고, 정책 현장에 반영하는 새로운 시도로 평가된다.

참여형 거버넌스: 새로운 관리 패러다임

일부 지역에서는 주민 참여형 자연 관리 모델이 시도되고 있다. 제주도의 마을 어장 관리나 지리산 국립공원의 주민 협력 프로그램이 대표적 사례다. 이러한 접근법은 지역 주민을 단순한 규제 대상이 아닌 관리 주체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캐나다의 원주민 공동관리 사례나 호주의 문화경관 보전 프로그램은 전통적 지식과 현대적 관리 기법의 성공적 결합을 보여준다. 이들 지역에서는 과학적 모니터링과 전통적 관찰 방법이 상호 보완적으로 활용되며, 정책 결정 과정에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참여한다. 그 결과 생태계 보전 효과와 지역 사회 수용성이 동시에 향상되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

기술과 제도의 융합: 디지털 시대의 자연 관리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기술의 발달은 자연 관리 방식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위성 영상 분석을 통한 실시간 산림 모니터링, 센서 네트워크를 활용한 수질 관리, 드론을 이용한 야생동물 개체 수 조사 등이 일상화되고 있다. 이러한 기술적 진보는 자연에 대한 더욱 정밀하고 포괄적인 정보 수집을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기술의 발달이 곧 더 나은 자연 관리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데이터의 양적 증가가 질적 이해의 심화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빈번하다. 수많은 센서가 생성하는 방대한 데이터를 해석하고 정책에 반영하는 능력이 기술 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현상이 관찰된다.

스마트 기술의 양면성

IoT 센서와 인공지능을 활용한 스마트 환경 관리 시스템은 24시간 실시간 모니터링을 가능하게 한다. 한강의 수질 관리 시스템은 분 단위로 오염도를 측정하고, 이상 징후 발견 시 즉시 경보를 발령한다. 이러한 시스템은 환경 사고의 조기 발견과 신속한 대응을 가능하게 만든다.

반면 기술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현장 경험과 직관적 판단 능력은 퇴화된다. 센서가 포착하지 못하는 미묘한 변화나 복합적 상황에 대한 대응 능력이 약화되는 부작용이 나타난다. 또한 기술 시스템의 오작동이나 해킹 위험성도 새로운 관리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시민 과학과 참여형 모니터링

스마트폰 앱을 활용한 시민 참여형 생태 조사가 확산되고 있다. eBird나 iNaturalist 같은 플랫폼을 통해 일반 시민들이 야생동물 관찰 데이터를 제공하고, 이는 공식적인 생태 연구에 활용된다. 국내에서도 ‘생물다양성 관찰 네트워크’나 ‘시민과학 프로젝트’가 운영되고 있다.

이러한 시민 참여형 접근법은 전문가만의 영역이었던 생태 조사를 민주화한다. 동시에 시민들의 환경 인식을 높이고 자연에 대한 관심을 증진시키는 교육적 효과도 거둔다. 다만 데이터의 정확성과 일관성을 확보하기 위한 검증 시스템의 구축이 중요한 과제로 남아있다.

미래 전망: 자연과 제도의 새로운 관계

기후변화와 생물다양성 위기가 심화되면서 기존의 자연 관리 패러다임에 대한 근본적 재검토가 요구되고 있다. 예측 불가능한 극한 기후 현상과 급속한 생태계 변화 앞에서 기존의 정적인 관리 방식은 한계를 드러낸다. 적응적 관리와 회복력 기반 접근법이 새로운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자연 기반 해법(Nature-based Solutions)의 확산은 자연을 보호의 대상에서 협력의 파트너로 인식하는 전환을 보여준다. 도시 홍수 관리에 활용되는 그린 인프라나 탄소 중립을 위한 생태계 복원 사업은 자연의 기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사례다. 이러한 접근법은 자연과 인간 사회의 공생적 관계 구축 가능성을 제시한다.